성경강해

<聖經> 요나4:1-11

<題目> 요나의 불평

 

<序言>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에 멸망을 선포하자 니느웨 사람들이 모두 금식하며 회개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본장에는 그에 대한 요나의 반응과 하나님의 권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요나의 항변(1-3), 요나의 고통(4-8), 하나님의 교훈(9-11)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本論>

       1. 요나의 항변 (1-3)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니느웨 사람들이 왕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금식하며 회개를 하자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3:10).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요나 선지자는 매우 싫어하며 성을 내었습니다 (1). 요나 선지자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잔뜩 화가 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처음 내렸을 때 그는 그 첫 번째 명령을 거부하고 다시스를 행해 도망했었습니다 (1:1-3). 그런데 요나 선지자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다음 하나님의 두 번째 동일한 명령에서는 온전히 순종하여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했었습니다 (3:1-4).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자 (3:10) 화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격렬하게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전에 하나님이 니느웨 멸망을 선포하라는 첫 번째 명령을 하셨을 때 하나님은 인애가 크신 분이기 때문에 결국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거부했었다는 것입니다 (2). 요나 선지자가 고국 북이스라엘에 있을 때 하나님이 임하여 니느웨로 가서 멸망을 선포하라고 했었습니다. 그때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욥바로 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멀리 도망하려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결국엔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신 분이기 때문에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 뜻을 돌이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게 된다면 결국 이방 적국을 이롭게 한 것이 되고 선지자로서의 자기 위신이 떨어질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점 때문에 니느웨 멸망 선포에 대한 명령을 거절했었는데 하나님이 환난을 당하게 하면서 재차 명령하셔서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을 줄 알고 니느웨 멸망 선포 명령을 거부했는데 왜 그대로 시행하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자신에게 왜 그런 명령을 내렸으며 왜 그대로 시행하지 않으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 선자자는 하나님께 생명을 거두어 가시라고 했습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자기에게 나음이라고 했습니다 (3).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 명령대로 자신이 니느웨 멸망을 선포했으나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해주신 것에 대해 극한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나으니 자신을 죽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실족한 것은 자신이 선포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자기 위신이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보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실족한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 오해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하시려는 일은 그로 하여금 니느웨 멸망을 선포하게 하므로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가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므로 그들이 회개하므로 용서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고 하나님이 그를 통해 하시려는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그토록 실족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한 때 실족하여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호소한 적이 있었습니다 (왕상19:4). 엘리야 선지자는 당시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자신을 죽이려 하자 광야로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습니다. 자신이 생명을 다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바알과 아세라) 숭배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갈멜산에서 우상의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했습니다. 그로인해 아합왕도 하나님이 참 신인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실세였던 왕후 이세벨도 우상을 위한 정책에서 하나님을 위한 정책으로 돌아설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세벨은 더욱 완강해졌고 엘리야까지 죽이려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이세벨이 두려워 광야로 도망했다가 죽기를 구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실행했던 사역이 실패로 돌아가자 실족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통해 하시려는 뜻은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상19:15-16). 그런데 그는 자신을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잘못 알고 실패했다고 생각하고는 실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실족하여 예수님에 대해 의심한 적이 있습니다 (11:3). 그는 예수님을 구원자로 심판자로 증거했고 헤롯왕의 죄에 대해 지적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헤롯왕을 심판하고 자신을 구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복음사역과 치유사역만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실족하여 예수님이 정말로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구원자인지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예수님은 그가 보낸 제자들에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11:5). 그리고 이어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11:6). 세례 요한이 실족한 것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하시려는 뜻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실족한 것은 자기가 전한 메시지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바라기 보다는 자기가 잘되길 바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길 소망해야 하고 하나님 뜻대로 되면 성공한 것으로 여기고 기뻐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요한복음3:30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고 했고, 사도바울은 빌립보1:20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로마서12:2“~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고, 에베소서5:17에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했습니다.

 

 

       2. 요나의 고통 (4-8)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은 성을 내는 요나 선지자에게 그가 성을 내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4). 하나님이 앗수르의 도성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었고 하나님이 요나 선지자를 통해 하시려는 사역이 성공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요나 선지자가 성을 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시는 일에 그는 순종만 하면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잘못을 지적하되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 성읍을 나가 성읍 동쪽에 앉아 초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5). ‘초막은 나뭇가지들로 엮어 만든 임시 시설물을 말합니다. 요나 선지자가 초막을 지은 것은 뜨겁게 작렬하는 햇볕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보려고에 해당하는 이레에’(יראה)는 미완료형으로서 요나 선지자가 니느웨 성읍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 성읍이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니느웨 성읍이 잘 보이는 니느웨 성읍 동쪽 언덕에 초막을 짓고 그 초막의 그늘 아래서 니느웨 성읍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신 일에 대해 탄원하는 기도를 했으므로 하나님이 다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여 요나 선지자를 가리게 했습니다. 이는 요나 선지자의 머리를 위해 그늘을 지게 하므로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요나 선지자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6). ‘박 넝쿨로 번역된 키카이온’(קיקיון)조롱박을 말하는데 근동지방에서 서식하는 넝쿨 식물로서 잎이 약 30cm 자라고 줄기가 약 3m까지 자란다고 합니다. 요나 선지자가 뜨겁게 작렬하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초막을 지었지만 나뭇가지로 엮어 지었기 때문에 그 엉성하게 엮인 나뭇가지로는 그 햇볕을 완전히 가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로인해 그는 머리가 뜨거워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상당히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박넝쿨을 준비하여 신속하게 자라게 하여 초막을 덮게 하므로 그가 고통을 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박 넝쿨로 인하여 심히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므로 박 넝쿨이 시들었습니다 (7). ‘벌레로 번역된 톨라’(תולע, 단수)유충’ ‘구더기등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박 넝쿨을 갉아 먹은 것을 보면 곤충의 애벌레로 여겨집니다. 요나 선지자가 박 넝쿨 그늘로 인하여 기뻐했으나 다음날 새벽에 하나님이 벌레로 하여금 박 넝쿨을 갉아 먹게 하므로 햇볕을 가려주던 박 넝쿨의 잎들이 시들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해가 뜰 때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였습니다 (8). ‘뜨거운 동풍은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시로코(Siroco)라는 바람인데 그 열기가 40도에 이를 만큼 뜨거운 바람이라고 합니다. 초목이 그 바람에 노출되면 메말라버리고 사람이 그 바람을 맞게 되면 목이 말라 물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며 호흡도 곤란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 바람을 오래 쐬게 되면 탈수현상이 심해져 열병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 뜨거운 바람으로 인해 벌레가 먹어 시들은 박 넝쿨 잎이 더욱 말라 비틀어졌을 것이고 요나 선지자도 그 바람을 맞으므로 뜨거운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초막의 나뭇가지 사이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므로 그 고통은 더 컸을 것입니다. 한편 그 동풍은 하나님이 예비하셨다고 했습니다. 바다의 폭풍과 큰 물고기도 하나님이 예비하셨다고 했었는데 박 넝쿨과 벌레와 동풍도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가지고 그것들까지도 뜻을 이루기 위해 이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준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박 넝쿨과 벌레와 동풍을 준비하여 이용하신 것은 요나 선지자에게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에 대해 교훈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신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요나 선지자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박 넝쿨이 마르고 뜨거운 동풍과 햇볕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자 혼미해졌습니다. 고통이 심하여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8). 3절에서는 하나님이 니느웨 성읍을 멸망시키시지 않은 데 대해 실족하여 죽기를 구했는데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박 넝쿨을 제거하신 것에 실족하여 죽기를 구한 것입니다. 그는 12만 명이나 되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있는 니느웨 성읍이 멸망하기를 바랐습니다 (1-3,11). 그들이 재앙으로 고통 가운데 죽을 것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게 오는 고통에 대해서는 크게 여기고 하나님께 불평하며 항거하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 성읍 동쪽 언덕에 초막을 짓고 니느웨 성읍이 어찌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느니웨 성읍을 멸망시키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로마서3:29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3:28).

 

 

       3. 하나님의 교훈 (9-11)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이 죽기를 구하는 요나 선지자에게 박 넝쿨로 인해 성을 내는 것이 옳으냐고 하자 그는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다고 했습니다 (9). 하나님이 요나 선지자에게 박 넝쿨이 말라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성을 내는 것이 옳으냐고 묻자 그는 박 넝쿨이 마른 것으로 성을 내는 것이 옳다고 한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박 넝쿨의 마름으로 인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성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이 박 넝쿨이 마르므로 인해 성을 내는 것은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자신이 당하는 고통 자체에 대해서만 강한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에게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10-11). 하나님께서 박 넝쿨의 가치와 니느웨 사람들의 가치를 비교하면서 요나 선지자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자기가 심지도 재배하지도 않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린 박 넝쿨도 아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큰 성읍 니느웨 특히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나 되었으며 가축도 많이 있는 니느웨를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니느웨는 아주 큰 성읍이었습니다. 성읍의 크기는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에만 3일이나 걸릴 정도였습니다 (3:3).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둘레는 약 100km나 되었고 직경으로는 약 30km나 되었다고 합니다. 견고하기로는 성벽의 높이가 30m나 되었고, 그 성벽 위 너비는 3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구수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 명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를 도덕적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자로 보는 이들이 있으나 다음에 가축도 함께 나오는 것을 볼 때 단순히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고대에 그런 연령대는 전체 인구수의 정도로 보기 때문에 니느웨의 전체 인구수는 약 6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Keil, Deane). 하나님이 그 많은 60만 명, 그리고 그 중에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12만 명의 어린 아이들, 그리고 수많은 가축들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는 어른들의 죄행에 참여하지 않은, 혹은 그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하고 참여한 어린 아이들입니다. ‘가축은 인격체가 아닌 동물로서 사람의 죄행에 그것이 전혀 죄인 줄 인지하지 못하고 이용당하는 육축들입니다. 하나님은 어찌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멸망시키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회개한 니느웨를 용서하여 멸망시키지 않은 것이 옳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한낱 박 넝쿨도 귀하게 여기면서 니느웨 성읍의 많은 생명들은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죄악 중에 있는 자라도 회개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에스겔18:23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심히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15:7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고 한 생명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15:3-32).

 

  특히 악인들의 생명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즈음에 독일의 히틀러는 주변 국가들을 정령하고 수많은 교회를 없애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것을 본 당시 목사이면서 신학자였던 독일의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본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히틀러 정권에 저항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군중들에게 자동차가 사람을 향해 달려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면서 히틀러에 저항하고 심판해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다 1,943년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1,945년에 처형되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히틀러 같은 폭군을 심판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그에 대해 투쟁하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지...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자신이 죽어 천국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습니다. 거기에 히틀러도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히틀러에게 지옥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히틀러가 항변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있을 때 사후에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한 번이라도 알게 해 주었더라면 믿었을 텐데 누구 하나도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본훼퍼는 꿈에서 깨어나 히틀러를 정죄만 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께는 긍휼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도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結言>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이 느니웨 성읍을 멸망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타적인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언약민으로 자부하면서 동시에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멸시했습니다. 더욱이 앗수르 제국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죄악이 많은 적국에 대해서는 마땅히 하나님이 멸망시켜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이방나라 특히 앗수르 제국 같은 나라에 대해서는 선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민인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이방 민족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복음이 성령님의 역사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온 세계에 전해져 온 세계의 이방인들도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전도와 선교에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28:19-20, 1:8).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베드로전서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