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 나훔1:1-15
<題目> 니느웨에 대한 심판 선언
<序言>
본장은 하나님이 온 세계를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분으로서 이방 사람들의 죄악까지 간과하지 않는 분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에 대해 진노하시고 니느웨(Nineveh)가 심판받을 것을 예고합니다. 니느웨는 앗수르(Assyria) 제국의 수도로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은 앗수르 제국 전체에 대한 심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하나님의 권위 계시(1-8절), 하나님의 심판 선언(9-15절)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하나님의 권위 계시 (1-8절)
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본서는 니느웨에 대한 경고입니다 (1절上). ‘니느웨’(Nineveh)는 앗수르(Assyria) 제국의 수도입니다. 위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생한 티그리스강 상류 강변 동쪽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모술 맞은편이었습니다. 도성의 크기는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에만 3일이나 걸릴 정도였습니다.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둘레는 약 100km나 되었고 직경으로는 약 30km나 되었다고 합니다. 견고하기로는 성벽의 높이가 30m나 되었고, 그 성벽 위 너비는 3대의 마차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구수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만 해서 12만 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4:11).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대략 7세 이하의 어린이로 본다면 고대에 그런 연령대는 전체 인구수의 ⅕정도로 보기 때문에 니느웨의 전체 인구수는 약 6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Keil). 당시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남유다 예루살렘보다 더 컸었는데 인구수가 약 3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니느웨가 얼마나 큰 성읍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로서 니느웨에 대한 경고는 앗수르 제국에 대한 경고입니다. 앗수르 제국은 우상숭배가 극심했고 교만했고 잔인했습니다.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살육하고 약탈하고 학대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언약백성을 징벌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을 도외시한 채 이기적인 탐욕을 채우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나 선지자를 통해 멸망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그들이 회개하자 용서하셨습니다 (욘3:1-10). 그런데 요나 선지자 때로부터 약 70여년이 지난 나훔 선지자 때에는 다시 교만과 탐욕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마치 개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았습니다 (벧후2:22). 그래서 하나님이 나훔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멸망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본서는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 글이었습니다 (1절下). ‘나훔’(Nahum)은 성경에 그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어 그에 대한 정보가 없는 편입니다. 다만 남유다 출신의 선지자로 여겨지며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앗수르 제국의 니느웨에 대해 예언한 선지자임은 분명합니다. ‘나훔’(נחום)이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자’입니다. ‘엘고스’(Elkosh)는 니느웨 근처(지금의 이라크 모술 근처)의 알구스(Algus)라는 견해, 갈릴리 지방의 한 마을인 엘카우즈(El-Kauze)라는 견해, 갈릴리 지방의 한 마을인 ‘가버나움’(‘나훔의 마을’이라는 뜻)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남유다의 서남쪽(지금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과 가자 중간 지점)에 위치한 케시예(Kessijeh)라는 견해가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Young, Pfeiffer, Raven). A.D.4C에 기록된 에피파피우스(Epiphapius) 감독의 책 ‘선지자의 생애’(Lives of the prophets)에서도 엘고스를 남유다 서남쪽 도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묵시’(默示)에 해당하는 ‘하존’(חזון)은 ‘보는 것’이라는 뜻으로 ‘이상’ ‘계시’ ‘환상’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본서는 나훔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니느웨의 멸망에 관한 계시를 받아 기록한 책인 것입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2절). ‘질투’와 ‘진노’와 ‘보복’은 하나님이 언약관계에서 자기 백성에게 가지는 열정적인 의지를 표현하는 말들입니다. ‘질투’(קנוא)는 하나님은 언약백성이 언약을 어기거나 다른 민족이 언약백성에 고통을 가할 때 느끼는 시기이며, ‘진노’(חמה)는 언약백성이 언약을 어기거나 다른 민족이 언약백성에 고통을 가할 때 가지는 분노이며, ‘보복’(נקם)은언약백성이 언약을 어기거나 다른 민족이 언약백성에 고통을 가할 때 내리는 징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거슬려 대적하고 자기 백성에게 해를 가하는 대상에게 질투를 느끼고 진노하여 벌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앗수르 제국은 우상을 숭배할 뿐 아니라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살육하고 약탈하고 압제했습니다. 특히 북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남유다까지 침략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징계하여 바로 세우려 했으나 그들은 지나치게 행한 것입니다 (사10:5, 36:1, 나2:2). 그에 대해 하나님은 보고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고통을 당할 때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신원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백성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질투하게 하시고 진노하게 하시고 보복하게 하시는 행위인 것입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3절上).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긍휼과 자비와 인애가 많으신 분으로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출34:6).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죄악에서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반드시 징벌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민14:18). 하나님은 권능이 크신 분으로서 원하는 징벌을 내리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거나 약해서 징벌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롬2:4-5). 사실 니느웨는 이미 심판을 받아 멸망해야 마땅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 선지자를 통해 멸망을 선포하게 하므로 그들을 회개하게 하고 그들이 회개하자 용서해 주셨습니다 (욘3:1-10). 그런데 그 니느웨가 나훔 선지자 때에는 다시 이전 상태로 돌아갔고 상태가 그보다 더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을 심판하여 멸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라고 했습니다 (3절下). 회리바람과 광풍과 구름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현상으로 많이 언급하는 것들입니다 (출19:16, 욥38:1, 시18:10-15, 사28:2, 29:6, 66:15, 렘23:19, 슥7:14, 9:14). 이는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감히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오셔서 심판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하고 지혜로운 자들이라도 이를 조금도 거슬릴 수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겔18:23, 벧후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악에 대해서 절대 묵인하지 않는 분입니다. 민수기14:18에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레위기26:21에는 “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5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6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여호와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신다고 했습니다 (4절上).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 바다를 갈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셨고 (출14:21-22),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요단강을 갈라 마른 땅처럼 건너게 하셨습니다 (수3:14-17). 하나님은 그처럼 권능으로 자연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앗수르 제국의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을 배경으로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바다와 강을 말리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능히 그 강도 명령하여 마르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앗수르 제국도 능히 파멸시킬 수 있는 분임을 암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든다고 했습니다 (4절下). ‘바산’(Bashan)은 요단강 동쪽 요르단 지역으로 비옥한 목초지가 많아 소나 양을 많이 기르는 지역이었습니다 (암4:1, 겔39:18). ‘갈멜’(Carmel)은 요단강 서쪽 북이스라엘 지역으로 관목지대이며 올리브와 포도가 많이 재배되는 곳이었습니다 (사35:2, 렘50:19, 미7:14). ‘레바논’(Lebanon)은 북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지역으로 백향목 등이 많고 향기로운 꽃들이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왕상5:6-10, 왕하19:23, 아4:11). 그래서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든다는 말은 하나님이 풍요로운 땅도 황폐화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가진 앗수르 제국도 하루아침에 멸망시킬 수 있는 분임을 암시합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는다고 했습니다 (5절上). 하나님이 꾸짖으시면 견고한 산들도 지진이 날 때처럼 흔들리고 흘러내린다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른다고 했습니다 (5절下). 하나님이 꾸짖으시면 견고한 땅들 곧 사람들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이 솟아오른다는 것입니다. 마치 지진이 날 때처럼 솟아오르기도 하고 뒤집히기도 하고 꺼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서 아무리 견고한 곳도 하나님이 진노하여 꾸짖으시면 모두 파괴된다는 말로서 하나님이 견고한 앗수르 제국도 멸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니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그의 진노를 감당하겠느냐고 했습니다 (6절上). 우주와 세계를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분노하고 진노하시면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여 멸망시키기로 작정하면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진다고 했습니다 (6절下). 하나님이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며 바위들이 산산조각이 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앗수르 제국을 멸망시킬 때에는 앗수르 제국이 아무리 강한 제국이라 할지라도 멸망하되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가루가 되고 말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7절).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와 세계를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분으로서 그 대상이 대적할 때 진노하여 심판하시는 분이지만 맹목적으로 진노하시거나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극히 선하신 분으로서 환난 날에 산성이 되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산성’은 성채(요새)로서 환난을 당했을 때 그리로 피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셔서 환난 때에 그에게 피하는 자에게는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59:16에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요새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시9:9, 18:2, 37:39, 71:3, 94:22, 144:2). 그리고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아시느니라’의 원형 ‘야다’(ידע)는 ‘알다’의 뜻입니다. 이는 지적인 앎이 아니라 경험적인 앎으로서 인격적인 관계에서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창4:1, 삿3:1).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피하는 자를 아신다는 말은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 상황과 심정을 아시고 친히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죄악으로 치닫는 대상을 심판하여 멸망시키시되 그런 가운데서도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를 지켜 주셔서 안전과 평안이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Calvin).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신다고 했습니다 (8절). 본문의 맨 앞에는 접속사 ‘와우’(ו)가 있는데 ‘그러나’(But)의 뜻으로 본문이 앞 절과 반대되는 내용임을 알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께로 피하는 대상에게는 산성이 되어 주시지만 끝까지 대적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범람하는 물과 흑암으로 진멸하고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범람하는 물’은 심판의 수단인 홍수로 멸망시킬 것을 의미합니다. ‘흑암’은 심판의 수단이 아니라 심판의 결과적 장소로서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지게 할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니느웨가 물밀듯이 들이닥친 바벨론 군대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할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Deane), 실제 홍수로 완전히 멸망당할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Johnson). 앗수르 제국의 니느웨는 바벨론 제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메데 연합군이 니느웨를 함락시키기 위해 니느웨를 3년 동안이나 포위해서 함락시켰는데, 그리스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에 의하면 성읍이 포위되었을 당시 엄청난 폭우와 천둥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로마의 역사가 디오도루스 시켈로스(Diodorus Sikelos)에 의하면 포위한 3년째 되는 해에 폭우가 내려 인근 강이 범람하고 그로인해 성읍 일부가 잠기고 성벽 일부가 유실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제국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남유다도 멸망시키기 위해 침략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압제하며 조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약국가를 침략한 것과 언약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자기에 대한 대적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한 그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여 멸망시키려 한 것입니다. 출애굽기23:22에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스가랴2:8에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을 자기 눈동자처럼 지키십니다 (신32:10, 시17:8). 히브리서13:5에는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 믿는 믿음과 하나님 말씀을 지키다가 순교당한 자들이 하늘 제단 아래서 신원하여 달하는 호소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일곱 대접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 때마다 제단에서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탄과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와 믿지 않는 대적들을 영원히 타는 유황 불 못에 던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에게 가하는 보응입니다 (계6:10, 16:1-21, 20:9-10, 2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현재에 힘들어도 그 분을 신뢰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로마서8:31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 선언 (9-15절)
9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9절上에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고 했습니다. ‘너희’에 대해서는 남유다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으나 앗수르 제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Teodoret, Kimchi, Rosenmiiller). 그래서 본문은 앗수르가 하나님께 대해 무엇을 공작하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해 행한 것은 하나님께 행한 것으로 간주하고, 앗수르 제국에게 유다에 대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9절下). 앗수르 제국이 남유다에 대해 어떤 음모를 꾸밀지라도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을 완전하게 멸망시킬 것이므로 다시는 재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재난’에 해당하는 ‘차라’(צרה)는 ‘재난’ ‘대적’의 뜻으로, 앞의 ‘너희’를 앗수르 제국으로 볼 경우 여기에서는 재난의 의미로 이해하기 보다는 대적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할 경우 본문은 하나님이 앗수르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켜 다시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곧 하나님이 앗수르 제국을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흔적도 없이 멸망시킬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실제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땅 속에 묻힌 그 터만 겨우 발견될 뿐입니다.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라고 했습니다 (10절). 여기에서 가시덤불같이 엉클어졌다는 말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뒤엉킨 상태를 의미합니다.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했다는 말은 무절제하고 방탕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라는 말은 마른 짚이 타는 것처럼 완전히 멸망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죄악 가운데 방탕한 앗수르 제국이 다시 완전히 멸망하여 사라지고 말 것을 가리킵니다.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될 당시에 앗수르 왕과 신하들이 주연을 베푼 자리에서 잔뜩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아람 왕 벤하닷과 바벨론 왕 벨사살도 그와 유사한 상황에서 파멸을 맞았습니다 (왕상1:16, 단5:1-30).
11절에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앗수르 제국(니느웨)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은 앗수르 제국의 왕을 가리킵니다. 본서의 시대적 배경은 B.C.664-612년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앞서 수십 년 전 B.C.701년에 앗수르 제국의 왕 산헤립이 남유다를 침략했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47개의 성읍을 정령하면서 예루살렘까지 포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 유다 백성들을 여러 비방하는 말로 모욕했습니다.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히스기야의 신들도 그 백성을 내 손에서 구원하여 내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왕하18:28-35, 대하32:17, 사36:14-20). 그와 같이 악을 도모하는 왕이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앗수르 제국의 특정한 한 왕을 염두에 둔 말씀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앗수르 제국의 모든 왕들을 통칭한 말씀일 것입니다 (Calvin, Deane). 그래서 그 왕들이 앗수르 제국(니느웨)의 백성들에게 사악한 것을 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을 대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고 했습니다 (12절上). ‘그들이’는 앗수르 제국(니느웨)을 가리킵니다. 앗수르 제국이 아무리 군사력이 강할지라도 반드시 멸절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앗수르 제국의 군사력은 당대에 최고였는데 그럴지라도 아주 멸절시켜 세상에서 없어지게 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2절下). 여기에서 ‘너’는 남유다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전에는 앗스르 제국의 침략을 허용하여 남유다를 괴롭게 했지만 다시는 앗수르 제국이 침략하여 괴롭게 하는 일이 없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에 B.C.701년 남유다는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 제국의 침략을 받아 성전과 왕궁의 보물들까지 빼앗기며 온갖 수모를 당했습니다 (왕하18:13-37). 하지만 앗수르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므로 다시는 남유다가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남유다 백성에게 있어서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고 했습니다 (13절). 여기에서 ‘네’는 남유다를 가리키고, ‘그’는 앗수르 제국(니느웨)을 가리킵니다. ‘멍에’(נתק)는 짐승의 목과 어깨에 메우는 도구를 말합니다, ‘결박’에 해당하는 ‘모세르’(מוסר)는 굴레를 가리키는바 굴레는 짐승의 입이나 코에 채운 재갈이나 코뚜레에 연결된 고삐에 걸쳐 얽어매는 줄, 혹은 짐승의 머리나 목에 연결된 고삐에 얽어매는 줄을 말합니다. 곧 멍에와 굴레는 짐승을 부리기 위해 채우는 도구로서 구속과 억압과 압제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 동안 앗수르 제국의 왕들은 영토 확장을 위해 북이스라엘 뿐 아니라 남유다까지 침략하여 압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그 앗수르 제국의 멍에를 깨뜨리고 결박을 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앗수르 제국을 완전히 멸망시키므로 북이스라엘뿐 아니라 남유다가 앗수르 제국 왕들의 압제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上에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네’는 앗수르 제국(니느웨)을 가리킵니다. ‘이름’은 어떤 존재에 대한 인격이나 그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전파되지’에 해당하는 원형 ‘자라’(זרע)는 ‘뿌리다’ ‘낳다’ ‘퍼트리다’ 등의 뜻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앗수르 제국 왕들의 존재가 퍼트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서 그 왕가가 다시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기 때문입니다. 또한 14절中에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앗수르 제국의 신전에 있는 우상들을 다 멸절시킨다는 것입니다. 앗수르인들은 앗술, 나부, 말둑, 벨, 이쉬타르 등의 우상들을 숭배했는데 그것들을 다 멸절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우상들의 멸절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들이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동시에 그들의 멸망 원인이 하나님 나라인 남유다를 압제한 것뿐 아니라 우상숭배에도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리고 14절下에는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없게 되었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앗수르 제국 왕을 죽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나라인 남유다를 압제하고 각종 우상을 숭배한 자로서 하나님 앞에는 아무 가치나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남유다를 징계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가치나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15절上에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앗수르 제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남유다가 그 압제에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화평’에 해당하는 ‘솰롬’(שלום)은 화평, 평화, 평안. 안전, 번영, 행복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그래서 화평은 남유다가 압제에서 벗어나 평화롭고 안전하고 번영하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발이 산 위에’ 있다는 것은 긴급한 소식을 산꼭대기에서 산꼭대기로 전달하는 당시 풍습에서 기인한 것으로, 앗수르 제국의 멸망과 남유다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이 빠르게 남유다 전체에 전해질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15절中에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고 했습니다. ‘절기’는 언약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3대 절기인 유월절(무교절)과 오순절(칠칠절)과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을 가리킵니다. ‘서원’은 언약백성이 하나님 앞에 자원하므로 어떤 것들을 지키거나 드리기로 약속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앗수르 제국의 압제에 있을 때에는 그러한 절기를 제대로 지킬 수 없었는데 이제는 절기를 지킬 수 있게 되고, 앗수르 제국의 압제에 있을 때에 고통 속에서 서원한 것들을 이제는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물론 그러한 절기와 서원을 지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권고, 그리고 그러한 절기와 서원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촉구가 포함된 의미가 있기도 할 것입니다. 15절下에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절기와 서원을 지키게 되었다는 선언, 혹은 절기와 서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권고, 혹은 절기와 서원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촉구의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 앗수르 제국의 왕과 군대가 완전히 진멸되어 다시는 남유다에 다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앗수르 제국을 반드시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전도서12:14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반드시 멸망당하되 흔적도 찾을 수 없도록 멸망하게 됩니다. 시편37:35-36에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백성을 능욕하는 자들을 반드시 심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들이 더욱 힘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역사해 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요소와 환경들을 제거하여 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이전 영광을 회복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므로 어려운 환경에서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다고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일하실 때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신실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환경을 회복시켜 주실 때 그 동안 지키지 못했던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며 어려울 때 맹세한 서원을 지켜야 합니다. 민수기30:2에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고 했고, 신명기23:21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고 했고, 전도서5:4에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고 했고, 시편15:4에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고 했습니다.
<結言>
구약성경에서 책 전체가 이방 나라를 향해 한 예언서는 3권이 있습니다. 오바댜, 요나, 나훔입니다. 오바댜는 에돔에 대한 예언이고, 요나와 나훔은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중에 요나는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했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 용서해주므로 하나님의 긍휼을 강조한 반면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일관되게 예언한 내용입니다. 당시 앗수르 제국은 북이스라엘을 점령하였고 (B.C.722년), 남유다까지 점령하기 위해 침략했습니다 (B.C.701년). 그래서 북이스라엘뿐 아니라 남유다도 앗수르 제국의 압제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훔 선지자를 통해 앗수르 제국을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완전하게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남유다 백성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훔은 일관되게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한 내용이지만 남유다를 위한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후서1:3-4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위로를 생각하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